[토나카즈] 그녀만이 가질 수 있을 행운의 부적
* 카즈마 ts → 카즈미 주의
* 현패러
새 서랍장을 샀다. 옛날식 손잡이가 달린 크림색 3단 수납장이었다. 나무 물결이 뻗친 옛 서랍장 속 버릴 물건들은 따로 정리했다.
작동하지 않는 스톱워치,
수학 풀이로 빼곡한 노트,
내가 쓴 적 없는 조그마한 머리핀.
하얀 리본 장식이 뜯어진 걸 보니 묻어 놓았던 기억이 금방 떠올랐다. 10살 즈음, 카즈미가 턱 하나 없는 인도에서 거하게 넘어지며 망가진 머리핀이었다. 학부모 수업참관일이었나, 평소보다 들뜬 카즈미는 아끼는 분홍 원피스를 차려 입고 머리핀까지 꽂으며 기분을 냈다. ‘2교시부터 엄마 아빠랑 같이 수업하는 거지? 토나이네 아주머니랑 아저씨도 오셔?’
그 비슷한 말을 하다 제 발에 제가 걸려 고꾸라졌다. 머리핀에 달린 리본은 뜯어지고 원피스 밑단엔 얼룩이 심하게 졌다. 하얀 무릎과 팔꿈치 위로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난 엄마가 늘 가지고 다니라며 이르셨던 손수건을 꺼내 카즈미의 무릎을 덮었다. 엷은 하늘색 천 가운데가 빨갛게 물들었다. 카즈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지만, 결코 울고 싶지는 않은 듯한 얼굴로 제 무릎을 바라보았다. 부슬거리는 머리칼이 발간 뺨을 가렸다. 아프고, 억울하고, 서러운 눈이 분홍 머리 가닥 사이로 얼핏 보였다. 꼭 다문 입술이 오들거리고 있었다.
‘많이 아파?’
‘아냐, 토나이. 빨리 가자.’
‘다시 집 갔다가 갈래?’
‘늦으면 선생님이 혼내실 거야. 보건실 가면 되니까……, 그냥 가자.’
겨우 10살이었던 나는 키도 체구도 비슷한 당시의 카즈미를 업고 가기엔 무리였다. 물론 시간이 더 걸릴 뿐 아주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 복잡한 등굣길에 남학생이 여학생을 업고 등교하는 어마어마한 짓을 벌였다간 뭇 아이들의 숱한 놀림을 받을 것이 뻔하였다. 우라카제랑 산탄다랑 사귄대, 같은. 당연히 난 그런 우스갯소리가 싫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리 창피하지도 않았지만 카즈미의 입장을 고려하면 안 될 짓이었다. 대신 평소보다 카즈미에게 바싹 붙어 엉거주춤 일어선 그녀를 부축하며 학교에 갔다. 어깨를 붙잡은 손이 신경 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이 부분의 기억은 애매했다. 절뚝거리는 다리에 속도를 맞춰 걸으니 마치 2인 3각 경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인 등굣길에서 온전히 그녀에게 집중하려 애쓰고, 호흡을 맞춰 한 발짝 한 발짝에 공을 들였다. 그 날 카즈미는 결국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모습으로 수업에 참가해야 했고, 나는 카즈미가 자신의 반창고를, 흐트러진 머리를 부끄러워하는 게 진심으로 싫었다.
…엉겁결에 내가 이 머리핀을 가져왔었나 보다.
어린 카즈미의 울적한 낯이 둥실거렸다. 카즈미는 남들은 겪지 않았을 사소한 사건사고와 함께 컸다.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날에 다치고, 특별하고 싶은 날에 결코 특별할 수 없는. 그 아이만의 징크스 혹은 저주 같았다.
발에 치이는 액자가 꺼내 들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의 사진이었다. 푸른 숲 사이에서 학생 30명이 옹기종기 모여 단체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딱 한 명,
그 애는 없었지만.
수학여행 당일에 비가 오면 어쩌느냐며 애 같은 걱정을 하던 카즈미는, 손꼽으며 기다렸던 수학여행에 갈 수 없었다. 전 날 새벽에 일어나 예쁜 도시락까지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감기에 걸렸다. 미열 수준이 아니라, 열이 펄펄 끓어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느 아침처럼 그녀를 데리러 간 나는 식은땀을 죽죽 흘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카즈미를 보고 진심으로 당황했다.
2박 3일간의 수학여행은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재미없었다. 활동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기야 수학여행의 의의는 낮 동안의 활동보다는 소등 이후 아이들 사이의 대화에 있는 거니깐. 선생님 몰래 남자 숙소로 건너온 몇 여학생들과 잠들지 않은 남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흔한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좋아, 가 바로 그것이다. 몇 아이들은 얼굴이 시뻘개져선 고개를 숙였고 신이 난 나머지 애들은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대답을 강요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카즈미를 생각했다.
아저씨가 준비하신 얼음주머니를 이마에 얹고, 아주머니가 달이신 모과차를 홀짝이며 힘겹게 끙끙거릴 카즈미를 생각했다. 아니야, 벌써 자고 있을지도 몰라, 오늘 카즈미가 좋아하는 프로 하는 날인데 약 먹고 기운 좀 났다고 TV를 켜려다 아주머니께 꾸중을 들을지도, 그러면서 내내 그 애만 떠올렸다.
만약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누군가가 내게 ‘우라카제 군은 누굴 좋아해?’ 라는 싱거운 질문을 해 내가 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너만을 바라보며 ‘비밀이야.’ 라고 대답할 거고, 몇 아이는 나의 고집스러운 시선을 눈치 채곤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거고, 나는 그들이 추측하는 애정 관계를 조금도 부정하지 않고 계속 너를 바라봤을 텐데.
그런 유치한 상상까지 하며 카즈미만을 떠올렸다.
마지막 날, 사진을 찍을 때는 조금 짜증까지 났다. 이런 굵직한 행사의 단체사진은 대개 두고두고 남아 학급 게시판에도 부착되고 졸업앨범이나 문집에도 실리기 마련이다. 그럼 카즈미는 교실 뒤 게시판을 볼 때마다, 학년이 끝난 후 문집을 받을 때에도, 졸업앨범 뒤 사진 모음을 구경할 때에도 오직 자신만 없었던 그 날의 열을 떠올릴 것이었다. 자기 얼굴만 쏙 빠진 30명 아이들의 웃는 낯을 바라보며 힘 빠진 웃음을 보이겠지.
재미없는 수학여행이 끝나자마자 나는 짐만 방에 내려놓곤 곧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열이 조금 가시긴 했지만 여전히 나른한 상태의 카즈미가 방문을 열며 흐리게 웃었다.
‘토나이, 지금 온 거야? 재밌었어?’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평소처럼 상냥하게 구는 카즈미가 가슴 시렸다. 이틀 만에 보는 카즈미가 비어있던 그 자리에 알맞게 들어찬 기분이 들었다. 무료했던 2박 3일간의 일정 속에 꼭 있어야 했을 그 아이를 보니 답답했던 맘이 그제야 풀렸다. 카즈미, 속상했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는데, 사진도 많이 찍고 싶었고 새로 산 블라우스도 입어보고 싶었잖아. 그런 말들은 내 안에서만 멀겋게 떠올랐다. 카즈미의 뺨에 내 손등을 대 보았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살결에 닿았다. 카즈미는 ‘토나이?’ 라며 내 이름을 불러보다 이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재미없던데.’
‘진짜?’
‘어. 하나도 재미없었어.’
카즈미는 내 말이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살짝 감으며 웃었다. 무언가 고마운 일이 생겼을 때 곧 잘 보이는 얼굴이었다. 거짓말 아닌데. 이 바보야. 정말 지루했어. 네가 없어서. 이런 말은 왜 가장 알아줬으면 하는 당사자 앞에서만 쏙 들어가는지를 고민하는 중2의 내가 있었다.
“토나이, 들어가도 돼?”
“…어. 응.”
과거의 카즈미에 대한 회상을 맺고 지금의 카즈미가 사뿐사뿐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한테 딸기 가져다 드리려고 왔어.’ 라는 말을 덧붙이며 카즈미는 내 곁에 앉았다. 그녀의 자리였다. 싱글거리는 눈매가 가만히 나를 보았다.
“서랍 새로 사서 짐 정리 하는 거야?”
“응. 꽤 많네.”
“그러게. 어, 이거 내 머리핀이야? 엄청 어렸을 때 했던 거 같은데.”
정리하다보니 무의식인지 고의인지 버릴 물건과 쓸 물건, 카즈미와 관련된 물건으로 나뉘어 세 영역을 차지했다. 카즈미는 금방 감상에 젖어 이건 수영장에서 잃어버린 열쇠고리 뒷부분, 이건 키우다 실패한 물망초 씨앗 남은 거…. 카즈미 역시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카즈미를 붙잡는 징크스, 혹은 저주는 참 질기게도 그녀를 울게 만들었다. 꼭 직접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랄수록 카즈미는 여러 부분을 포기하게 됐고, 자기방어적인 포기에 뒤따르는 미련과 서글픔을 전부 겪어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무겁게 웃곤 했는데, 난 그것을 눈물로 여겼다. 카즈미는 세상에서 가장 애처로운 웃음으로 울었다. 무엇이 그녀를 매번 울게 만들까. 명치가 쑤셨다.
“이것도 있네, 네잎클로버 코팅한 거.”
“그러게, 너가 나한테 줬었나?”
“아냐. 토나이가 나한테 준 거야.”
기억 안 나?
카즈미가 곱게 코팅된 네잎클로버를 내밀며 물어왔다.
아.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카즈미에게 네잎클로버를 준 적이 있다. 카즈미는 내가 준 네잎클로버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 사이에 끼어 꽤 오래 보관하고 있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또 시간이 흘러서 직접 코팅한 후 내게 돌려줬다.
‘토나이가 가지고 있어줘. 내가 갖고 있다가 잃어버리거나 망가지면 어떡해.’
여태 잘 보관하고 있어 놓고는 자신 없이 흐리는 목소리에 화가 났다. 하지만 카즈미의 부탁이니까, 서랍 가장 안쪽에 몇 년을 변함없이 두었다. 아마 받은 네잎클로버를 서랍에 넣으면서도 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 날도 카즈미는 어떤 불상사에 휘말려 조용히 훌쩍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어떤 날이 오더라도 놓지 않을 사람처럼 꼭 잡고는, 군데군데 민들레와 양지꽃이 피어오른 풀밭을 무척이나 천천히 걸었다. 봄바람이 조금씩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눈물을 식혔다. 나는 토끼풀이 잔뜩 피어있는 풀밭 앞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울음을 진정시킨 카즈미가 등 뒤에서 몇 번이나 왜 그러느냐며 물었으나 답도 없이 토끼풀을 뒤적였다. 카즈미는 아무런 말도 없는 내 등을 지키며 조용히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네잎클로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 나는 달리 꾸미는 말도 없이
‘줄게.’
라며 카즈미의 손에 네잎클로버를 쥐어주었다.
결과적으로 행운을 상징한다는 이 토끼풀을 카즈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못 했으나, 카즈미는 실망도 질책도 하지 않고 “기억났어? 그때 토나이가 나 달래주려고 찾았잖아.” 라며 남의 속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었다.
“토나이.”
“응.”
“이거, 계속 토나이가 가지고 있어 줘.”
“너 그만 좀 다치라고 찾아준 건데, 내가 계속 가지고 있음 어떡해.”
“하지만 왠지,”
토나이가 가지고 있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리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맞아. 어쩌면.
내가 이 부적을 들고 평생 네 곁에 있을 테니까.
비록 너는 여전히 자주 다치고 아파하지만,
우는 너를 절대로 잊지 않고 제일 먼저 찾아낼 테니까.
하고 생각하며 흠집 하나 남지 않은 네잎클로버를 보듬듯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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