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자에몽을 진단하신 니이노 선생님이 내린 병명은 ‘망애 증후군’ 이었다. 기억상실증 정도였다면 외려 대수롭지 않았을까. 낯선 이름의 뜻은 이러했다. 사랑하는 이를 잊는 병이란다. 그 진단에 반 아이들 모두가 일제히 나를 우려했다. 구태여 티를 낸 녀석은 하나 없었다. 나는 짐짓 경직된 녀석들 사이를 헤쳐 지나 그를 불렀다. 하치자에몽. 그가 나를 보았다. 말간 시선을 마주하며 꺼낼 말을 골랐다. 산책이라도 할래? 나로선 드문 다정함이란 것도 모르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그에게만 병명을 일러주지 않으셨다. 그의 세상은 어제와 다를 바 없다. 교정도 식사도 친구들도 선생님도 그 자리를 멀쩡히 지키고 있다. 하치자에몽은 평범한 풍경 속 홀로 이질적인 나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 속없는 성격은 영 고쳐지지 않으려나.
“왜 너만 기억이 안 날까.”
“그러게, 한 번 잘 추측해 봐.”
그의 눈썹이 구겨졌다. 고민할 때 주로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가 저리 인상을 쓸 때면 나는, 손끝으로 미간을 슬쩍 짚으며 그러다 주름 생긴다는 둥 얄미운 말을 해댔다. 그럼 짙은 눈썹이 일순간 곧게 펴지다가 그 아래 눈꺼풀에 고요한 무게가 일곤 하였다. 굵은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던가.
“…저 지붕 위에서 너랑 나랑 가끔 불침번도 섰어.”
“그래?”
“응.”
그와 선 불침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한 겨울이었다. 그는 새벽 내내 몇 번이나 내게 춥냐고 물었다. 나는 매번, 너는 안 추워? 라고 물으려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이 쪽을 흘끔거리던 눈 위로 보라색 밤하늘이 내려앉았다.
“너 위원회 일 도와준 적도 많아.”
“그건 좀 고마운데.”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홀로 사육장을 수리하는 게 퍽 가여워 일을 거들어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감사를 군말 않고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내내 장난처럼 그에게 가책을 떠넘겼다. 그는 그런 내게 어이없이 화를 내면서도 말끝마다 미안하단 사과를 붙였다.
“또 없어? 너랑 있었던 일.”
“많지. 5년을 같이 있었는데.”
“더 얘기해줘, 기억이 날지도 모르니까……,잠깐만.”
거기 웅덩이 있어.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 보호대 위로 그의 굵은 손가락이 감겼다. 입술이 어색하게 비뚤어지는 것을 숨기며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축축한 땅 위로 지저분한 이물질이 떠다니는 흙탕물이 고여 있다. 나와 그는 웅덩이를 피해 일렬로 걸었다. 손목 위론 여전히 그의 손이 닿아 있었다.
뭐라고 할까.
가슴이 차게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새어나오는 차가움에 가슴 뿐 아니라 손끝까지 데일 것만 같았다.
맞다. 보통은 이렇게 손목을 잡지. 자신의 그 사람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별 의미도 없이, 그렇게 잡지. 그야 제 손가락 위에서 쿵쿵 뛰고 있는 그의 맥박보다는 웅덩이를 피하는 일이 우선인 것을. 가죽 아래 맨 살이 홧홧했다. 이런 순간에 나는 왜 그의 어설펐던 손길을 떠올리고 있는 건지. 잎사귀가 엉기는 교정 어느 가장자리에서 붙잡혔던 그 날의 피부를 상기시키고 있는 건지. ‘너는, 내 손목을 잡을 때면 꼭 가시 박힌 나뭇가지에 손을 대듯 지나치게 조심스러웠어. 붙든 상태에서도 몇 번씩 손을 고쳐 잡으며 좀 더 자연스러운 자세를 찾았고, 불안한 엄지를 까딱거리며 내 손등 위를 톡톡 두드렸어.’ 같은 말이 나올 것 같은지. 당연히 말할 일은 없지만.
“슬슬 돌아갈까?”
그가 나를 보았다. 실로 오랜만인 시선이었다. 하치자에몽이 사람을 볼 때의 눈빛. 그는 그림자 한 줄기 그어지지 않은 눈길로 타인을 봤다. 조금 당황스러워 가벼운 응시에서 회피했다. 그는 그런 나의 행동에 대해 별 말도 없이 나아갔다. 불쾌한 두근거림이 낮게 울렸다. 나쁜 짓을 하다 들켰을 때 어린아이가 느끼는 박동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의 평범한 시선을 오랜만이라고 느끼다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의’ 그의 눈길을 애써 몰아냈다.
숙소로 돌아오자, 라이조는 내게 괜찮냐며 걱정을 표했다. 나는 자그마하게 웃어 보이며 답을 대신했다. 그는 곧 안도 어린 호흡을 뱉더니 씻고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방 안에 천천히 누웠다. 까끌까끌한 나무 바닥이 뺨에 닿았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노을이 나를 품었다. 곧 밤이 될 색이었다.
미안해. 라이조. 거짓말을 했어.
놀랍게도,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눈을 감은 나는 오늘 그와의 산책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생략했던 무수한 과정들을 회상했다.
하치자에몽, 너는……, 내가 미간을 짚으면 성질을 부릴 듯 눈에 힘을 주면서도 발갛게 물드는 뺨은 감출 겨를이 없었어. 나는 네 색을 늘 무시하며 시선 끝자락에나 간신히 담아냈어. 어쩌다 한 번 손목이라도 잡게 되면, 근데 하필 그게 또 임무 중이라면, 힘겹게 맘을 추스르는 널 볼 수 있었지. 복면으로 가릴 수 있었다고 넌 착각했겠지만. 함께 불침번을 선 날에는 말이야. 넌 네 입술이 퍼렇게 질리는 지경이 되어서도 내 상태를 살폈어. 그 집요한 시선이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바로 보여 솔직히 일부러 피한 적도 많아. 한 번은 내 가면이 어긋나게 걸쳐져 있던 날이 있었어. 아무도 없는 밤이니, 모른 척 가면이 떨어지길 기대할 수도 있었잖아. 근데 넌 내게 손을 뻗어 가면을 바로 고쳐주었지. 난 일부러 내 뺨을 향하는 네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는데. 벗겨냈어도 화내지 않았을 텐데. 바보 같은 너는 내 뺨에 닿았던 네 손가락이나 신경 쓰기 바빴다. 같이 사육장을 짓던 날에는 어땠더라. 지붕 위에 올라 상태를 점검하는 나를 네가 멍하니 바라보았어. 살짝 일그러진 눈썹, 살짝 떨리는 눈매. 너의 응시는 늘 그윽하고 간절했지. 따갑고 간지러운 맘이 빽빽하게 뒤섞인 너의 눈. 조금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맞아. 난 네가 원래 사람을 볼 때 어떤 눈을 하는지 잊을 정도로……. 네 복잡한 눈길에 적응 했었나봐. 영영 그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나봐. 되도록 더 오래 잠겨있고 싶었나봐….
하지만 어느 하나 말해주지 않을 거야. 텅 빈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 널 원망하지도 않을 거야. 기뻐해. 하치자에몽. 사실 이건 선물에 가깝다. 매번 골 아프게 하던 너의 사랑니가 빠져버린 거야. 그 것 뿐이야.
끝난 회상을 주워 담을 여력이 없었다. 손목 보호대를 보았다. 노을이 끝나가고 있다. 다 꺼져가는 불씨처럼 힘없이 빛을 붙든 나의 가슴은 머지않아 영영 죽어들 테다.